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모토 유타카 (문단 편집) == 이모저모 == * 야구만화 [[원아웃]]에 등장하는 데니스 존슨의 모델이다.[* 작중에서 데니스 존슨은 육상선수 출신으로 수비에 능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입단 초기의 후쿠모토 유타카의 수비가 이랬다고 한다. 물론 이 만화는 아예 야구선수 자체를 안해 본 미국 흑인 육상선수를 일본프로야구팀이 달리기만 시키려고 순수 대주자용 용병으로 데려왔다는 터무니없는 설정이라 현실성이 지극히 낮다.] 실제로 작중에서 [[토쿠치 토아]]가 존슨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은 후쿠모토 유타카를 막아내기 위해 실제로 쓴 [[잘도 이런 미치광이 짓을|방법들로]] 당시 파리그 포수들은 후쿠모토의 도루를 막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가동했다고. * 현재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용되는 쿠세(버릇)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선수이다. 입단당시만 해도 워낙 주루센스가 형편 없었기에 이대로는 곧 은퇴하겠지라는 생각에 추억을 남기기 위해 비디오를 녹화해 달라고 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그 비디오를 유심히 보다 우연히 견제와 공을 던질때의 동작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후로 투수들이 견제를 하는 동작과 던지는 동작의 버릇찾기에 몰두. 이후 투수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후쿠모토가 전설적인 도루왕이 되면서 너도나도 후쿠모토의 방법을 따라하게 되었고 쿠세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역으로 후쿠모토를 잡아내기 위해 비슷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 [[노무라 카츠야]]였고, 결국 이러한 연구들은 노무라 특유의 'ID 야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 쿠세와 관련하여 [[스즈키 케이시]]와 [[칸베 토시오]][* 이후 [[기아 타이거즈]]의 투수코치였던 그 칸베 토시오 맞다] 쿠세만큼은 찾아내기가 힘들어서 비디오를 수없이 반복하여 본 결과 칸베 토시오는 축을 2mm정도 움직이면 투구, 스즈키 케이시는 눈이 타자쪽으로 가면 견제 주자 쪽으로 가면 투구라는 비범한 쿠세를 찾아내었으나 [[호리우치 츠네오]]만큼은 결국 쿠세를 찾아내지 못 해 [[일본시리즈]]에서 발이 꽁꽁 묶일 수 밖에 없었다. * 사회인 시절부터 팔꿈치 부상이 있었기에 입단 초창기에는 수비가 엉성해서 만세를 한 채 머리위에 날아가는 공을 놓치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매일 200개 가까운 노크로 훈련을 거듭한 결과, 은퇴 할 당시에는 개인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뛰어난 수비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 [[켄 그리피 시니어|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는데]], 아내는 야구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후쿠모토를 야구 좋아하는 회사원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게 된 것을 "나 마츠시타에서 한큐로 옮긴다"고 간단히 얘기했는데, 아내는 한동안 후쿠모토가 한큐 [[역무원]]으로 취업한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아내는 나중에 [[한큐]]의 각 역마다 남편을 찾으러 다녔다가 역무원에게 자신의 남편이 '한큐에서 일하는 후쿠모토'라고 이야기했더니, 그 역무원이 "당신이 찾는 사람이 설마 그 도루왕 후쿠모토 아닌가요?"라고 되물은 뒤에야 자신의 남편이 프로야구 선수인 걸 알게 되었다. * 그의 아버지는 다른 구단 계열의 식당 직원이었는데, 후쿠모토의 한큐 입단 후 입단에 대한 은혜를 느껴서 퇴직했다고 한다. * 도루왕 3연패와 '''단일시즌 100도루'''를 동시에 달성한 1972년, 양다리에 1억엔의 상해보험을 들었다. 이 보험은 후쿠모토가 은퇴할 때까지 계약이 갱신되었으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탁월한 주루센스로 부상없이 선수생활을 계속한 터라 후쿠모토가 보험금을 타는 일은 없었다. 그의 별명 중엔 '''"1억엔의 다리"'''란 별명이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리고 후쿠모토의 1억엔 보험 가입 소식을 접한 [[최동원]]의 부친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최동원에게 어깨 상해보험을 들게 했다. 최동원의 부친은 당시 일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던 부산의 사정도 있고 해서 일본 야구에 관심이 많았고 [[호리우치 츠네오]]의 드롭커브를 모티브로 최동원의 커브를 단련시키기도 했다.] * 당시 관중동원에 어려움을 겪던 [[퍼시픽 리그]]의 사정과 그를 타개하고자 했던 구단 측의 기묘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일화로, 1983년에 있었던 후쿠모토 대 '''[[말]]'''의 달리기 시합 이벤트가 있었다. [[https://www.sankei.com/west/news/140913/wst1409130001-n1.html|기사]] [[https://www.dailymotion.com/video/x2k9jon|소개 영상. 9분 10초부터.]] 후쿠모토와 경주마 외에 메이저리그 통산 196도루를 기록한 한큐의 외국인 선수 범프 윌스[* 메이저에서 주전 2루수로 5년 가까이 뛰었기에 4년 4억엔 보장(부머 웰즈가 연봉 2500만엔이었다.)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단하였고 1년차 때는 12홈런-20도루에 2할대 중후반 타율과 8할 즈음의 OPS를 보여준 훌륭한 공격형 2루수가 되었다. 그러나 2년차에 먹튀가 됐고 시즌 중인 8월 귀국하였으며 시즌 후 입단 시 보장받았던 남은 2년치 연봉의 절반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자진퇴단하였다. 당시 똑같이 일본프로야구 용병선수 출신으로 은퇴 후에 일본에 눌러앉았던 [[로베르토 바르본]]의 말에 의하면 선수로서의 자기관리(work ethic) 자세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일본 야구를 무시하고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미국에 돌아갈 생각만 해 댔다고. 근데 경기 내적으로는 나름 최선을 다했는지 일본에서의 플레이는 호평을 받았고, 먹튀가 된 2년차 때도 범프가 있었으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을텐데.. 라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자기관리는 형편없었지만 실력만큼은 뛰어났던 듯. 사실 지금도 차이나지만 그 당시에는 미국과 일본의 야구실력 차이가 더더욱 엄청났기에 워크에식은 안 좋아도 성적이 좋은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가 참가했는데, 결과는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의 인조잔디 그라운드의 감촉에 당황한 경주마가 기수의 말을 듣지 않고 우왕좌왕하며 일찌감치 탈락한 끝에 윌스가 승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벤트 당시 어느 프런트 직원이 [[미노다 고지]]를 설사유망주라고 조롱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미노다는 불참했고 결국 87시즌 직후 미노다 고지가 원한 고향팀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아닌 당시 최신형 신칸센 300계 차량 기준으로도 고베에서도 3시간 넘게 걸리는 [[도쿄돔|도쿄]]에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내쫓아버렸다. 미노다는 대신 도쿄돔 개장경기인 한신전 시범경기때 1번타자로 선발출장해서 홈런을 날렸다. 이후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의 우승에 일조한 후 은퇴한다.] * 메이저리그 통산 도루 기록을 깼을 때 [[국민영예상]] 수상이 검토되었으나 "[[노상방뇨]]를 할 수 없게 된다"는 특이한 이유로 거부한 적이 있다.[[https://www.news-postseven.com/archives/20130409_181179.html|기사]] 보다 정확히는 후쿠모토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성격에 사적으로도 마작이나 술담배를 좋아하거나 했던지라, 행실에서도 타의 모범이 되었던 [[오 사다하루]]마냥 전국민적인 동경을 살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스스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 미국에서는 왕정치의 홈런 기록은 코라쿠엔 구장 크기가 작다며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쿠모토 유타카의 기록은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나 베이스 간 거리는 같다는 이유로 세계기록으로 인정했다. 코라쿠엔이 작기도 했지만, 홈런은 야구의 꽃이고 도루는 그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홈런만큼은 화려한 기록은 아니기에 자존심 상에 문제도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인 중에서도 그래도 기록은 기록이라며 왕정치의 홈런 세계기록을 인정하고 왕정치의 홈런볼이나 배트 등을 기념하는 곳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